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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으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오른편에 앉이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1:17-21)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6-9)

    "영과의 아버지께서...앉히사...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서 '앉다'라는 말의 뜻을 먼저 생각해 보자.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이 말은 거룩한 생활의 비결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행함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앉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의 기원은 그리스도이다. 이 그리스도는 친히 죄를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신 바로 그분이다(히1:3).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개개인의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시작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앉기 위하여 먼저 걸어 보려고 하는 헛수고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참된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자연적인 이성에 따라 생각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걷지 않고서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노력하지 않고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기독교란 정말 묘한 것이다! 만일 처음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시도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또 무엇인가를 얻으료고 한다면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지금 '하는 것'(do)이 아니라, 이미 '해놓은 것'(done)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서두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라고 말하고 있다(엡1:3). 그리고 우리를 처음에 초대하신 것은 그저 가만이 앉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룩해 놓으신 것을 즐기게 하려는 것이었지, 우리 힘으로 애써서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행한다'는 것은 '노력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했다(엡2:8). 우리는 자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면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주 예수님께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우리의 죄로 멍든 영혼의 짐을 주님께 얹어 놓았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행하는 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룩해 놓은신 일에 의존함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전까지는 참된 그리스도 인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오직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로 나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친히 이루어 놓으셨지."

    이렇게 말할 때 신앙생활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원리에 근거하고 잇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에는 제한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안에서 안식하고 그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앉아 있는 것'은 휴식의 자세다. 어떤 일이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에 일하는 것을 멈추고 앉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편안히 앉아 쉬는 것을 배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에 진보가 있다는 것은 역설적인 것 같지만 사실이다.

    그렇다면 '앉아 있다'는 말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걷거나 서 있을 때는 몸을 지탱하느라고 다리가 수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앉아 있을때는 우리 몸무게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의자나 소파에 온 전신을 기댄다. 걷거나 서 있을 때는 피곤하고 지치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앉아 있으면 편안함을 느낀다, 걷거나 서 있을 때는 많은 정력이 소비되지만, 앉아 있으면 곧 긴장이 풀린다. 왜냐하면 긴장되었던 근육과 신경이 모두 풀어지고, 대신 외부의 어떤것에 부담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앉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부담, 즉 우리의 짐, 우리 자신, 우리의 장래 문제, 그 외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짐을 지지 말고 주님께 모든 짐을 맡겨야 한다.

    이것은 태초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원리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첫날부터 엿새되는 날까지는 일하시고 제7일에는 안식하셨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심히 바쁘셨다.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치신 다음에는 활동을 멈추셨다. 그래서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안식일이 되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안식이다.
그러나 아담의 안식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이 안식할 즈음 아담은 어디에 있었는가? 아담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 6일 중 제일 끝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6일 동안 하나님이 일하실 때 아담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의 일곱째 날은 아담에게는 사실상 첫째 날이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을 하시고 그 후에 안식을 누리신 반면, 아담은 그의 생을 안식일에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안식하시기 전에 일하신다. 반면에 사람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 후에야 일을 할 수 있다. 아담의 생애가 안식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업이 실로 완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복음이 있다. 하나님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구속 사업 또한 완성하셨다. 우리로서는 구원받을 만한 공로에 해당하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믿음으로 하나님이 완성하신 귀한 사역에 직접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두 가지 역사적 사실, 곧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과 구속의 안식 사이에는 아담의 범죄와 징계, 인간의 끊임없고 헛된 노력, 잃어버린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힘써 일하고 자신을 내어 주신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속죄의 대가를 치르신 후에야 "다 이루었다." 고 외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승리의 환호성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유추해 온 것이 진실이 되었다. 기독교는 진실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룩하셨으며,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그 사실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열쇠가 되는 단어는 문맥상 '앉으라' 는 명령형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고 앉은' 우리 자신을 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우리의 마음 눈이 밝아져서(엡1:18) 하나님이 처음에 능력으노 '그를 앉히셨고' 그 다음에는 은혜로 '우리를 그와 함께 앉히셨다'는 이 이중적인 사실을 알게 되기를 간구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중요한 교훈은 그 일이 처음부터 우리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남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처를 주신다. 하나님은 아들이 이미 완성하신 업적을 가지고 오쇼서 우리에게 내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자, 앉아라."고 하신다. 내 생각에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것이 가장 잘 표현된 곳은 큰 잔치에 초대하실 때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라는 말씀이다(눅14:17).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완성하신 사업의 범위


    앞으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처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이 완성해 놓으신 일에 근거하여 전진한다. 모든 새로운 영적 경험은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즉 원한다면 새롭게 '앉음'으로 시작된다. 이것이 곧 생명의 원리요,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원리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나가려면 늘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원리를 따라야 한다.

    봉사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성령의 능력을 받을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할까? 하나님께 탄원해야 할까? 금식도 하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고행을 해야 할까? 결코 안 될 말이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죄가 어떻게 용서를 받았는가? 바울은 그것이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된 것이며 그 은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엡1:6-7).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즉 그분이 이룩하신 일을 근거로 하여 구속받았다.

    하나님이 성령을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 예수님이 높아지신 것이다(행2:3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나는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이 승귀하여 보좌에 앉으셨기에 나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는다. 주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심으로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그 선물은 나의 상태나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도 아니요, 또 무엇을 행함으로 성령을 받는 것도 아니다. 나는 걷지 않고 앉음으로, 어떤 일을 행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안식함으로 모든 것을 받는다.

    따라서 구원의 첫 경험을 기다릴 필요가 없듯이 성령의 부어 주심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탄원하거나, 필사적으로 노력하거나, 특별한 경험을 기다리며 오래도록 질질 끄는 집회를 가질 필요도 없음을 분며히 말해 둔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는 것은 자신의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귀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죄 사함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너희의 구원의 복음" 안에 포함된다(엡1:13).

    이제 에베소서의 특별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가? 우리로 그 몸의 일부가 되게 하는것, 곧 사도 바울이 '그의 충만' 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일까? 확실히 우리의 행함으로는 그런 곳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나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그분에게 연함될 수 없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4:4).

    에베소서는 그 연함의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고,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엡1:4).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그 즉시 더 이상 우리 쪽에서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와 연함된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의 것이 된다면, 지금 매우 긴급하고 실제적인 문제인 우리의 성화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가 현재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 받았음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수년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혀 온 우리의 '옛 사람'이 어떻게 '삽자가에 못 박히고' 제거되는가? 역시 그 비결도 행함에 있지 않고 앚아 있는데 있으며, 무엇을 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일을 의지하는데 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다(롬6:2). 또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룸6:3-4).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2:5). 이 모든 말들은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주 예수님이 약 2,000여 년 전에 예루살렘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나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경험이 지금 나의 영적인 역사(歷史)가 되었고, 하나님은 내가 '그분과 함께' 이미 모든 것을 가졌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미래의 일로 말히지 않을 뿐더러 지금 갈망해야 하는 것으로도 말한 적이 없다. 그 사실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이며, 우리 믿는 자들은 다 그 역사적 사실에 참여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살리심을 받고, 일으킴을 받고, 하늘에 앉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요한복음 3장3절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실로 의문이 갈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있다. 즉 중생처럼 우리 안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어떤 분 안에서 이미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는가? 우리는 설명할R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이 이룩하신 일을 받아 가질 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2: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연합한 것은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우리를 포함시키셨다. 우리는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성경이 그렇게 확언하고 또 나를 그곳에 두신 분이 하나님이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1:21).

    하나님이 그의 탁월한 지혜로 완성하신 것을 우리가 보고, 믿고,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다.

    내가 천원짜리 지폐를 책 속에 끼워 놓았는데 그 책을 태워 버린다면 그 지폐는 어디로 가겠는가? 책과 함께 재가 될 것이다. 그 책이 어디로 가든지 지폐는 따라다닌다. 책과 지폐의 역사는 하나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 두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그분이 겪은 모든 경험을 우리도 그 안에서 겪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삽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이것은 역사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출생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기록되었다. 이것을 믿는가?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영광스러운 역사적 시실이다. 우리가 죄에서 구출 받은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근거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장차 해주시려고 하는 일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룩하신 일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고 의지할 때(롬6:11), 거룩한 생활의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경험상으로 이것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면전에서 기분 나쁜 말을 던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입술을 꼭 깨물고, 이를 악물며, 침을 꿀꺽 삼키고는 주먹을 불끈 쥔다. 갖은 애를 써가며 분노를 감추고 이성을 되찾아 침착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만하면 잘 대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분노는 계속 남아 있다. 그 분노는 단지 감추어져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 분노를 감추지 못할 때도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당신이 앉기도 전에 걸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패배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행함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언제나 앉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죄에서 구원받는 비결은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룩해 놓은신 일을 의지하는 것이다.

    서구의 큰 도시에 살던 한 기술자가 고향을 떠나 극동 지방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2-3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가 없는 동안 아내는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남편의 절친한 친구와 도망치고 말았다. 그가 고향집에 돌아와 보니 자기 아내와 두 아이들은 물론, 그 친구도 온데간데 없었다. 그런데 내가 설교하던 집회의 마지막 날, 이 비탄에 잠긴 기술자가 나에게 와서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꼬박 2년 동안 제 마음은 항상 증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제 아내와 친구를 용서해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겠다고 매일 결심을 하지만, 늘 실패하고 맙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하려 들지 마세요."

    그는 깜짝 놀라 다시 질문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제가 계속 그들을 미워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당신의 문제 해결 방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당신의 죄만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까지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안에서 당신의 옛 사람도 못 박혔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당신'은 그분의 죽음 안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안에서 모든 상황을 다 다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처리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해 보십시오. '주여, 저는 사랑할 수 없고 이제 더 이상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의지하겠습니다.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 대신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도 제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해 주시기를 의탁합니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 생소한 말입니다. 저는 저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더니 조금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곧 대답했다.

    "하나님은 당신이 행하는 것을 중단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이 행하기를 중단할 때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십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본 경험이 있으신지요? 문제는 물에 빠진 사람이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때려서 의식을 잃게 한 후 해변으로 끌고 나오든지, 아니면 그가 발버둥치며 소리치도록 내버려두었다가 기진맥진할 때 구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그를 구출하려고 하면, 그는 두려움에 당신을 꼭 붙들고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당신도 죽고, 그사람도 죽게 될 것입니다. 하하님은 당신을 구하기 전에 당신의 힘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단 당신이 몸부림을 멈추면,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절망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기술자는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말햇다.

    "형제님, 이제 알았어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네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해주셨으니까요!"

    그는 밝은 얼굴로 기뻐하며 자리를 떠났다.

    주시는 자이신 하나님

    복음서의 비유들 중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는 탕자의 이야기인 것 같다. 아버지는 말하기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눅15:32).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구속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한 것은, 아버지를 위해 계속 일만 한 맏형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온갖 일을 하도록 만든 아우였다. 또 언제나 주는 자가 되기를 원한 맏형이 아니라, 늘 받는 자가 되기를 좋아하는 아우였다. 탕자가 방탕한 생활로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재산을 낭비한 것에 대해 한마디도 책망히지 않았으며, 또 재산의 행방을 일체 물어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모든 것을 소비한 것 때문에 애석해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아들이 다시 돌아와서 그에게 더 쓸 것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을 기뻐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부유하시기 때문에 주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보물 창고는 항상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보화를 우리에게 후히 주실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은 아주 섭섭해하신다. 탕자이지만 그에게 좋은 옷과 가락지와 구두와 또 잔치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또 장자에게서 이런 간청을 받아 보지 못한 것이 아버지에게는 섭섭한 일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드리려고 노력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너무나 부유하시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고, 또 주고, 무한히 주시도록 할 때 하나님은 진정으로 기뻐하신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섭섭해하신다. 그분은 아주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행하고, 또 행하고, 무한히 행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주시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며, 또한 영원히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그토록 부유하시고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모든 주는 것과 행하는 것을 하나님게 맡길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노력을 중단하면 선행도 중단하게 된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당신이 주는 것과 일하는 것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 당신이 어떤 일을 행했을 때보다 결과가 덜 만족스러울 거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행하려고 할 때는 우리 자신을 또다시 율법아래 두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일은 아무리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죽는 일' 이다. 하나님은 그 일이 무익하기 때문에 싫어하신다. 이 비유에서 두 아들은 똑같이 아버지 집의 기쁨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즉 맏아들은 비록 먼나라에는 가지 않았지만 이론적으로만 집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그의 마음은 평안하지 못했다. 그는 탕자가 했던 것같이 실제적으로 자신의 이론적인 위치를 누리지 못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선행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주는 것' 을 멈추라!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공급자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하기를 멈추라!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는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둘째 아들은 전적으로 잘못했다. 그러나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안식을 찾았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우리는 마땅히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