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라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행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앉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순서를 거스를 때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하다.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안에서 마음 놓고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주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모든 영적 경험은 안식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앉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앉는 것은 항상 행하는 것을 수반한다. 일단 우리가 잘 앉아서 쉬고 힘을 얻은 후에는 걷기 시작한다. '앉아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있는 우리의 지위를 말해 준다. 또 '행한다' 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하늘의 지위를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생활할 때에도 하늘의 표적을 지니고 다녀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에베소서에서는 행함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서신이 두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중 첫번째를 살펴보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엡4:1-2)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4:17,23).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2)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8-10).

    에베소서에서는 '행하다' 라는 말이 여덟 번이나 쓰였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돌아다니다' 라는 뜻인데, 여기서 바울은 비유적으로 '처신하다', '자신의 행동을 주관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행위' 라는 주제를 제시하며, 이 서신의 두 번째 부분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그리스도의 몸, 즉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에베소서의 또 하나의 큰 주제임을 보았다. 지금 에베소서 4장에서는 그러한 교제의 관점에서 이 거룩한 행함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의 거룩한 소명에 비추어 우리의 모든 관계에 대해 도전을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웃과의 관계,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 등을 가장 실제적인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 동떨어져 있고 비실제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두기를 바란다. 그것은 매우 현재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행동을 참되게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이 진실할 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단지 멀리 떨어진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집과 사무실에서, 가게와 부엌에서 거룩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부모들과 자녀들은 신약성경을 통해 부모와 자녀가 어떠해야하는지 살펴보기를 바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게 되었다고 말하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매우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무척 두렵고 놀랍다. 남편들과 아내들도 마찬가지다. 부부들을 위한 말씀들이 많이 있다. 에베소서 5장을 읽고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7장을 읽어보라. 이 장을 주의 깊게 읽으면 참된 결혼생활이 요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단지 이론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하나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서 모든 부부에게 유익할 것이다. 실제적인 것에 대해 이론만 내세우는 태도를 갖지 말도록 하자. 이제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을 살펴보겠다.

    "행햐여 ...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4:2)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엡4:2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엡4:28)

    "다시 도독질하지 말고" (엡4:28)

    "모든 악독과 ...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엡4:31)

    "서로 친절하게 하며 ... 서로 용서하기를" (엡4:32)

    "피차 복종하라" (엡5:21)

    "노엽게 하지 말고" (엡6:4)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엡6:5)

    "위협을 그치라" (엡6:9)

    여기 기록한 명령들보다 더 실제적인 것은 없다.

    주 예수님이 친히 이런 일에 대해서 가르치셨던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을 자세히 고찰해보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38-48)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는 이 말씀들처럼 살 수 없어요, 불가능한 요구들뿐이네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기술자의 경우처럼 당신은 피해를 받아 왔다고 생각한다. 아마 지독하게 큰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무리 해도 용서할 수가 없다. 당신은 옳았고, 원수의 행동은 전적으로 부당했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이상일 뿐이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완정성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날 부터 사람은 선악을 결정하는 일에 몰두해 왔다. 보통 사람들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에 대한 기준을 자기 나름대로 세워서 그 기준에 따라 살려고 애쓴다. 물론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다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다른가? 회심한 이후로 새로운 의의 관념이 생겼고, 그 결과 우리도 매우 정당하게 선악의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나무이시다. 우리는 윤리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나무가 아니라, 바로 생명나무이신 그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는 생명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의를 요구하는 것만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도 없다.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문제에 먼저 몰두하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당한 대우를 받아 왔는가, 아니면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는가?"

    그리고 우리가 한 행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러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사람이 내 뺨을 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신이 옳게 되기만을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생활 표준은 '옳으냐 그르냐' 가 아니라, 십자가여야 한다. 십자가의 원리가 곧 우리 행위의 원리다. 해를 악한과 선인에게 고루 비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께 그것은 은혜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이방인과 세리들의 원리다. 우리는 십자가의 원리와 아버지의 완전성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중국 남쪽 지방에 살고 있던 한 형제는 높은 지대에 논을 가지고 있었다. 날이 한참 가물 때 그는 물레방아 바퀴로 움직이는 양수기를 사용하여 조그마한 개울에서 물을 퍼 올려 그의 논에 물을 대어 두었다. 그 밑에 논 두 개를 갖고 있는 이웃이 하루는 밤에 논 둔덕을 터서 그 형제의 논에 대어 놓은 물을 전부 자기 논으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그 형제가 둔덕을 다시 잘 보수하고 더 많은 물을 양수기로 끌어올려 놓으면 그 이웃 사람은 또 그 물을 자기 논에 끌어넣곤 하였다. 이런 일이 서너 차례나 되풀이되자 이 형제는 견디다 못해 다른 믿음의 형제와 상담을 하게 되었다.

    "제가 지금껏 참고 보복하지 않았는데 이게 옳은 처사입니까?"

    그들은 이 문제를 놓고서 함께 기도했다. 그런 후에 믿음의 형제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단지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확실히 우리는 매우 부족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옳은 일 이상의 것을 해야 합니다.”

    이 형제는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그는 아래있는 이웃 사람의 두 논에 먼저 물을 퍼 올리고, 오후에 자기 논에 물을 퍼 올렸다. 그렇게 했더니 그의 논에 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이웃 사람은 그의 행동에 놀라 그 이유를 묻게 되었고, 그 후에 이 사람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형제들이여,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하지 말기를 바란다. 10리를 갔으니 이제는 옳은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10리라는 것은 단지 30리 혹은 40리의 상징일 뿐이다. 이 원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원리다. 우리는 어떤 것을 편들 것도 없고, 부탁하거나 요구할 일도 없다. 그저 주기만 하면 된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있게 한 것은 오로지 은혜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이 주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를 종종 옳지 않은 일을 행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실패한다. 그리고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은 항상 유익하다. 즉 실패를 통해 하나님께 자백하는 자세를 갖게 되고, 또 자백하는 데 꼭 필요한 것 이상의 것도 기꺼이 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주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왜냐하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 이 되기 때문이다(마5:45)

    문제는 실제적인 아들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5),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었다고, 성숙한 이들이 되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산상수훈이 가르쳐 주고 있는 사실은, 자녀들이 아버지와 유사한 정신과 태도를 드러내어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은혜를 나타내 보이며,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5:1-2)

    우리는 한 도전에 직면한다. 마태복음 5장은 그 수준이 너무나 높아서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는 하나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에베소서의 이 부분에서 바울은 그것을 다시 한 번 지지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리 안에서 그 표준에 도달하는 수단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도에게 마땅한 바"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엡5:3). 그렇다면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에 대한 우리의 문제의 해결책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울의 말 속에 그 비결이 있다. 그것은 곧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 이다(엡3:20). 이와 유사한 구절에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다시 에베소서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인 생활의 능력의 비결은 무엇인가? 언제 그런 힘을 가지게 되는가? 한마디로 답해 보겠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것'이다. 그분의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걸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앉는 것 다음에는 자연히 걷는 것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계속 걷기 위하여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어야 한다. 잠시라도 우리가 그 안에서 안식하기를 그치면, 곧 실족하게 되고 세상에서 우리가 증거한 것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러한 우리의 지위가 이 세상에서 그에게 합당하게 항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해 준다.

    만일 이와 같은 진보의 예를 원한다면, 달리는 경주자보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아니, 절름발이가 동력으로 움직이는 환자용 마차를 타고 달리는 장명을 생각해 보는 게 더 좋겠다. 그 절름발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달리지만, 또한 앉아 있다. 그리고 그는 앉아 있기 때문에 계속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그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물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완전히 묘사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의 행동과 행위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 안식을 취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바울의 말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는 먼저 앉기를 배웠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안식처에 이르렀다. 그 결과 그의 행함은 자신의 노력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강한 내적인 역사에 근거한다. 여기에 그의 능력의 비결이 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앉아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그의 행함이 그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었다. 따라서 그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그들) 마음에 계시게"기도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엡3:17).

    손목시계가 어떻게 가는가? 처음부터 그 시계가 움직여서 가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움직여 주어서 가는가? 말할 것도 없이 시계는 처음에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 움직여서 가는 것이다. 다만 그 시계는 조립된 대로 움직일 뿐이다. 우리 또한 만들어진 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하나님이 안에서 행하시며 이루신다! 그것은 곧 비결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행하시도록 기꺼이 허용하기 전에는, 아무리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해도 소용없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이루시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해지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사랑을 나타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랑이 없음을 발견하고 주님께 사랑을 달라고 구한다.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시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떤 형제가 있는데 당신이 그와 아무리 의좋게 지내려고 노력해 보아도 잘되지 않는다.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의 말이나 행동이 당신을 화나게 만든다. 이듬되면 당신은 무척 괴로워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그를 사랑해야 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겠어!"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기까지 한다.

    "주님, 그를 더욱 사랑하게 도와주세요! 하나님, 저에게 사랑을 주세요."

    그러고는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고, 모든 혈기를 짓누르고, 기도로 간구했던 바로 그 사랑을 그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에게 가기만 하면 또 무슨 일이 생겨서 그 선한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그 사람의 태도는 당신이 사랑을 나타내 보이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면 즉시 옛 분노가 되살아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를 정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당신이 하나님께 사랑을 구한것은 분명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 그 자체를 일종의 상품처럼 구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의 아들의 사랑을 당신을 통해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성령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 밖에서, 또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무엇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다(엡3:16,18). 우리가 외부로 나타내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 앞서 우리 안에 넣어두신 것이다.

    다시 한 번 고린도전서 1장30절의 위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두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진술 중 하나다. 이 말을 믿는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안에 넣을 수 있다. 또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신 사실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거룩을 미덕으로, 겸손을 은혜로, 사랑을 은사로 여기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나는 어떤 것이 필요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별개의 인격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내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들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임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2년 동안이나 확실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요하다고 느낀 미덕을 쌓아 보려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33년 어느 날, 하늘에서 빛이 내게 비추었는데 그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그분의 풍성함 가운데 그리스도를 내게 주신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렇게 내 생각과 다를 수가 있을까! 아, 내가 필요로 했던 것들이 따로 있는게 아니었구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은 전부 죽은 것이다.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것이 우리에게 새 생명의 시작이 될 것이다. 우리의 거룩이 이후로는 대문자 H(주님의 거록, Holy)로 쓰이게 되고, 우리의 사랑은 대문자 L(주님의 사랑, Love)로 쓰이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의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요구사항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 이제 앞에서 예로 들었던 그 대하기 힘든 형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에게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자. 

    "주님, 저는 그를 사랑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니만 이제는 제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법칙이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생명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노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분을 의지하라. 그분의 생명에 의탁하라. 그런 다음 그 형제에게 담대히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라. 여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아주 무의식적으로 당신은 자신이 그에게 아주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 아주 무의식적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며, 아 주 무의식적으로 그가 당신의 형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여기서 '무의식적' 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음에 '의식' 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진정한 사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당신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근심하거나,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어! 주님이 측량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와 함께하셨어. 주님의 사랑이 승리를 거둔 거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활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이다. 즉 우리의 노력 없이 이루어 어진다. 가장 중요한 법칙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그분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는 생명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물이 넘쳐나는 것은 생명샘에서 말미암는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허위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그들은 소위 '영적인' 삶을 살고, '영적인' 말을 하며, '영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모든 일들을 자기 힘으로 하고 있다. 그와 같은 노력은 뭔가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증거다. 그들은 그저 억지로 이것을 하지 않고, 저것을 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중국 사람이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말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외국어가 입에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억지로 그렇게 말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러나 중국 사람이 중국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어떤 행동은 잊어버릴 수 있어도 말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중국어는 그냥 흘러나온다. 그것은 중국인에게 완전하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 자발성이 바로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나타내 준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것은 내재하시는 성령에 의해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 생명의 법은 자발적이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가 애써 노력하던 것을 포기하고 우리의 온갖 겉치레도 내동댕이쳐 버린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스스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것만큼 해로운 것도 없거니와, 우리의 외적인 노력을 멈추고 우리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될 때만큼 복된 것도 없다. 이때 우리의 말, 기도, 생활은 모두 내적 생명의 자발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주께서 얼마나 선하신지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도 주님은 그와 같이 선하시다! 주의 능력은 위대한가? 그렇다면 우리안에서도 그 능력은 위대하다!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의 생명은 언제나 능력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한 생명은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능력 있게 나타날 것이다.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는주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이 모세 율법의 요구와 자기 자신의 준엄한 요구를 대조하시면서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을 반복하신 것을 보았다.

    이미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들은 처음에 언급한 표준에 도달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실패만 해왔는데, 어떻게 주님은 더 높은 표준을 제시하실 수 있는가? 그분은 오직 지신의 생명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요구를 부과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

    실로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타난 천국의 법을 읽으면서 위안을 얻게 된다. 이는 주님이 그의 자녀들에게도 유용하게 하신 그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믿고 있음을 보여 주기 대문이다. 이 세 장은 거룩한 생명에 따르는 거룩한 임무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요구사항이 크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자원이 그것들을 이행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수행하지 않으실 일을 명령하시 않으신다. 우리는 단지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할 뿐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가? 그것이 의와 불의의 문제인가? 혹은 선과 악의 문제인가? 우리는 따로 지혜를 구할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지식의 나무를 요구할 필요가 앖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옳고 그름에 대한 그리스도의 표준과 그 표준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취해야 할 태도를 기르쳐 준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의 관념을 손상시키고 우리의 반응 여하를 시험하는 일들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삽자가의 원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 즉 우리의 표준은 이제 옛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다(엡4:22-24).

    "주님, 저에게는 방어할 권리도 없습니다. 제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일본 여성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여자의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이 부인은 주님에 대한 단순하지만 실제적인 믿음으로 그 강도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또 자기 집 열쇠까지도 주었다. 그 강도는 이와 같은 그녀의 행동에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녀의 증거를 통해 그 강도는 예수를 믿고,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교리를 다 가지고 있지만 실제 생활은 교리와 모순되게 살고 있다. 그들은 에베소서 1-3장은 잘 알고 있지만, 4-6장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고 있다.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교리가 없는 게 낫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이루는 수단으로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는 단순히 의로운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는 것임을 주님은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 

    세월을 아끼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함의 문제에 대해서 더 첨가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행하다' 라는 말은 이미 앞에서 분명히 밝힌 바 있지만 좀 더 깊은 뜻이 있다. 첫째로, 행동이나 행위 및 전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행한다' 는 것은 '전진한다' 또는 '따라간다' 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에 대해 간략하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5-17)

    위 성경 구절에서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점과 시간관념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는 말씀은 중요하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두 성경 구절을 더 살펴보겠다. 

    "그때에 천국은 ...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쳐녀들이 와서"(마25:1-1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 이 사람들은 ... 순결한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1-5)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이 완수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성경 구절은 많다. 우리 구주는 최후 순간까지 구주가 되신다. 비록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최후에 이르러서 반만 구원받을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누구나 다 완전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바요, 다음에 말하고자 하는 것의 배경으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 하고 있다(빌1:6).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분은 능히 우리를 그분의 영광 앞에 흠이 없기 기쁨으로 서게 하실 수 있다(유24; 딤후1:12; 엡3:20참조).

    그러나 우리가 시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은 주관적 입장에서 생각할 때다. 즉 이 세상에서 현재 우리의 생활 속에 일어나는 실제적인 외적 활동을 생각할 때 시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처음 익은 열매들'(계14:4)과 '추수할 때 거두는 것들'(계14:15)이 있다. 추수 때 거둬들이는 것과 첫 열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질의 차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수확한 것은 다 똑같기 때문이다. 그들의 차이점은 단지 그들이 무르익은 시기에 있다. 어떤 열매는 다른 열매보다 먼저 익어서 '첫 열매' 가 된다.

    후켄 지방에 있는 내 고향은 오랜지도 유명하다. 나는 이 세상 어디서도 그렇게 좋은 오렌지는 생산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틀림없이 나의 편견이리라!). 오렌지의 계절로 접어들 무렵 언덕 위를 바라모면, 모든 숲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다. 그러나 좀더 세밀히 들여다 보면 나무의 여기저기에 금빛 오렌지가 벌써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짙푸른 나무 사이로 점을 찍은 듯한 금 조각이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중에 오렌지가 다 익고 나면 숲은 완전히 금빛으로 변하지만 지금 당장 수확되는 것은 이 첫 열매들이다. 이것들을 조심스럽게 따서 시장에 내다 팔면 최고의 가격을 받게 되는데, 보통 추수 때 가격의 3배는 받는다.

    어떻든 간에 모든 것이 익기는 다 익는다. 그러나 어린양은 첫 열매를 찾고 계신다. 비유에서 말한 '슬기로운 자들' 이란, 일을 더 잘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른 시간에 일을 다 해놓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순결을 지킨 처녀였으며, 어리석었을 뿐이지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슬기로운 자들을 따라서 그들도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그들 또한 등에 기름이 있었고, 등불도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늦게 오시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등불은 꺼져 가고 그릇에는 기름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 기름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어떤사람들은 이 지점에 이르러 주님이 어리석은 자들에게 "재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25:12) 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고민한다. 그들이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려진 자들로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나타낸다면, 어떻게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가 말하는 교훈의 전체적인 핵심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미래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전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섯 사람이 문에 와서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에게 주소서"(마25:11)라고 했다. 이 문은 무엇인가? 분명히 구원의 몸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버림받는다면 천국 문에 이르러 두드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25:12)고 말씀하실 때는 다음 예화처럼 어떤 제한된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상하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직결 재판소 치안관의 아들이 부주의한 운전으로 입건되었다. 아들이 법정에 끌려와 보니 아버지가 치안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아버지는 보통 다른 재판과 똑같이 재판을 진행했고, 그 아들에게 이름, 주소, 직업 등을 물었다. 그 아들은 깜작 놀라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아버지! 저를 모스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책상을 두드리며 무섭게 대답했다. 

    "이보게 젊은이,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하네, 이름이 무엇인가? 그리고 주소는?"

    물론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 아들을 전혀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가정 안에서는 분명히 그를 알았다. 그러나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한해서는 그를 알지 못했다. 여전히 그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 소년은 판결에 따라 벌금을 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다. 열 처녀 모두가 등에 기름이 있었다. 다만 미련한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비축해 두지 않았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영위하며, 사람들 앞에서 간증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살이처럼 살기 때문에 그들의 간증은 영구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성령을 가졌으나 성령으로 충만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위급한 때가 되면 기름을 더 사러 나가야만 한다.

    물론 결국에는 열 사람이 모두 충분한 기름을 가졌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일찍부터 충분한 기름을 가졌던 반면에, 미련한 처녀들은 결국에는 넉넉한 기름을 가졌지만 의도했던 목적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시간의 문제다. 또한 이 비유의 끝에 이르러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깨어 있는 제자가 되라' 고 권하실 때 말씀하시고자 하신 요점이 바로 이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하는 문제도 아니요, 성령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주기위해 오시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그릇 안에 남아 있는 기름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지속적이고 기적적인 공급으로 불이 꺼지지 않고 유지되는 문제다(이 비유에서는 등과 그릇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등이요 그릇이다). 이와 같은 내적 충만을 모르고서야 어느 그리스도인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겠는가? 확실히 어느 한 처녀도 이것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그와 같은 충만을 알도록 인도해 가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충만함을 받는다' 는 말은 여기서 성령과 관련해서 쓰인 보기 드문 표현이다. 계속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오순절 때와 같은 위기가 아니라, 우리가 항상 유지해야 할 상태다. 또 그것은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이다. 즉 영적인 은사나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표징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성령의 인격적인 임재와 활동의 문제다. 그것은 필요하다면 한 밤중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릇 안에서 불이 환하게 타오르도록 보중해 준다.

    더욱히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 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다음 구절(엡5:19)에서 명백하게 말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피차 의존하는 가운데 함께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 은 그 구절에서 보면 다만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독창보다 사중창이나 이중창이 박자와 화음을 맏추어 부르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라' 는 이 메시지는 에베소서 제2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엡4:13,15-16참조). 우리가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함께 부르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계14:3).

    그러나 우리의 주된 강조점을 나타내기 위하여, 어리석음이나 지혜로움이 오직 이 한 가지 요점에만 달려 있음을 거듭 말해 둔다. 즉 당신이 지혜롭다면 이런 충만을 더 일끽 추구할 것이지만, 만일 어리석다면 그것을 늦게까지 연기할 것이다.

    우리 중에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의 성격이 얼마나 심하게 다를 수 있는가! 부모가 어떤 일을 하라고 시켰을때 한 자년는 즉시 순종한다. 그런데 다른 한 자녀는 시간을 질질 끌며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실제로 상황이 이렇고 또 부모의 마음이 약해서 그 불순종하는 자녀에게 피해 갈 수 있는 여지를 준다면, 그때는 시간을 질질 끌던 자녀가 실로 현명한 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무사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려 들고, 또 일단 명령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취소될 수 없고 결국은 순종할 수 밖에 없을 경우에는 즉시 정직하게 명령 수행에 나섰던 자녀가 분명히 더 슬기로운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라.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삭감될수 있다면,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암시하고 있는 것을 당신이 피하려고 해도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뜻을 가지신 변함없는 하나님이시니 당신은 현명하라. 세월을 아끼라. 무엇보다도 그릇 안에 여분의 기름을 넉넉히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하라(엡3:19)

    이 비유가 우리의 모든 문제에 답해 주지는 않는다. 어리석은 자가 어떻게 기름을 샀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가 없다. 하나님이 결국 그의 모든 자녀들을 성숙으로 이끄시기 위해 취해야할 그 다음 단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은 첫 열매다. 우리는 그저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혹 우리가 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문제를 교묘히 피한다고 해서 당신이 성숙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혜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슬기로운 자는 시간을 아낀다. 나의 만년필이 지금 잉크가 꽉 차 있어서 당장 내 손에서 쓰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자들은 주님과 협력함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곧 하나님께 즉시 사용될 수 잇는 편리한 도구를 제공한다. 

    사도 바울을 보라. 바울은 불타는 열정으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바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때가 찬 것' 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엡1:9). 그는 "오는 여러 세대"에 완전히 나타날 그 구원을 의지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엡1:12; 2:7). 이 모든 것을 볼 때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는 행한다. 그리고 행할 뿐만 아니라 달린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고전9:26).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흔히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깨닫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볼 때,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아, 그들이 5년만 더 일찍 이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록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있지만 시간이 너무 짧다. 긴급조치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금 무엇을 가지셔야 하느냐가 문제다. 오늘날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준비된 도구다. 왜그런가?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상황은 절망적이다. 제발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다루셔야 할 것이다. 바울은 스스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15:8)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위기를 통과하여 그 당시 그가 있던 지점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것은 언제나 시간의 문제다. 하나님은 짧은 시간 내에 신속하게 우리 안에 어떤 일을 행하셔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많은 일을 이루셔야 한다.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그의 부리심의 소망" 이 무엇인지 알고, 또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 하는 사람처럼 행하기를 바란다(엡1:18; 5:17). 주께서는 항상 상한 영혼들을 사랑하셨다.


판본 #12
만듦 21 February 2022 19:29:17, 최훈
수정함 4 March 2022 09:11:41, 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