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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 흉배를 붙이고 ... 신을 신고 ... 방패를 가지고 ... 투구와 ... 검 ... 을 가지라 ... 기도하고 ...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스며"(엡6:10-11; 13-18).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앉는 것에서 사작해서 행하는 데에 이르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서는 것 또한 배워야 한다. 우리 개개인은 반드시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 법을 배워야 하고, 이 세상에서 그분에게 합당하게 행하는 방법도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원수 앞에서는 방법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이와 같은 투쟁의 문제가 에베소서의 제3부에 나타난다(엡6:10-20). 바울은 이것을 '악한 영들과의 씨름'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에베소서가 이와 같은 것들을 제시하는 순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순서는 이렇다.

    "앉고 ... 행하고 ... 서라."

    어느 그리스도인이라도 먼저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룩해 놓으신 일 안에서 안식을 얻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이 세상에서 거룩한 생활을 해나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 세대의 전쟁에 참전할 가망은 전혀 없다고 본다. 만일 이 중에서 어떤 것이라도 부족하면 그 사람은 영적 싸움에 대해서 하는 모든 이야기가 단순히 말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그는 전쟁의 실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사탄도 이런 사람쯤은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그리스도인이 먼저 그리스도의 승귀의 가치를 알고 그 다음에 그의 내주하심의 가치를 알게 되면,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다(엡6:10과 1:19; 3:16을 비교해 보라). '서다' 라는 말로 요약된 그리스도인 생활의 세 번째 원리를 참으로 이해하려면 '앉기' 와 '행하기'를 착실하게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는 큰 원수가 있다. 그 원수의 세력 아래에는 세상에서 악을 뿌리며,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밀어내 버리려고 하는 타락한 천사들과 헤아릴 수 없는 마귀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12절의 의미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를 대적하는 '혈과 육'만을 본다. 즉 적대적인 왕들과 통치자들의 세속적인 조직, 죄인들과 악한 사람들만을 본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씨름이 이런 것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약하면, 마귀의 궤계에 대한 것이다. 두 보좌가 전쟁 중에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자신의 영토라고 선포하시지만, 사탄은 하나님의 권위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교회는 사탄을 그의 현재 영역에서 내어 쫓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모든 것의 머리가 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먼저 일반적으로 우리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인 생활과 관련해서 이 전쟁 문제를 다루고, 그 후에 더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과 관련하여 그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사탄의 작접적인 습격이 많이 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써 생겨난 그런 어려움까지 마귀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잘 처리해야 하는지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육체적인 공격도 있다. 그것은 성도들의 몸과 마음에 가하는 악마의 공격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공격을 신하게 다루어야 한다. 확실히 우리의 영적 생활에 미치는 원수의 공격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문제 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려고 하는가?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앉아 있으며, 이 세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적인 동시에 우리의 적인 그 원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라!"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

    11절에 있는 '대적하다' 라는 말의 헬라어 동사는 '너의 진지를 지키라' 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 명령 안에는 귀한 진리가 담겨있다. 그것은 남의 영토를 침략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현대어로 '전투' 라는 말은 '행군하라' 는 명령을 내포한다. 대개 군대는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정복하기 위해 행군해 나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그런 행군이 아니다. 우리는 행군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지켜야 한다. '서다' 또는 '대적하다' 라는 말은 적군에 의해 공격당하는 영토가 진정 주님의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그 땅 위에 발판을 마련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에베소서에 묘사된 우리의 전쟁 무기는 대부분 순전히 방어 무기다. 같은 공격에 쓰이지만 방어에도 쓰일 수 있다. 방어전과 공격전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겠다. 방어전에 있어서는 내가 진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지를 지키기 위해 애쓰면 되지만, 공격전에서는 내가 가진 진지가 없기 때문에 그 진지를 빼앗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것은 주 예수님이 싸우신 전쟁과 우리가 싸우는 전쟁의 차이점을 명백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주님의 싸움은 공격적이었으나, 우리의 싸움은 본질상 방어적이다. 주님은 승리를 얻기 위해 사탄과 싸우셨다. 그분은 사로잡힌 자를 이끌어내시기 위해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전쟁을 바로 음부의 문턱까지 끌고 가셨다(엡4:8-9).

    오늘날 우리가 사탄과 싸우는 것은 주님이 이미 획득해 놓으신 승리를 계속 유지하고 굳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모든 어둠의 세계에서 승리자가 되었음을 선언하셨고, 도 그리스도께서 빼앗은 진지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그 진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싸울 필요가 없다. 다만 모든 도전자에 대항하여 그 진지를 지키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지키는 것이지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영토를 지키는 것, 곧 그리스도가 차지하셨던 영토를 지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하나님은 이미 정복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에게 주셔서 지키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영토 안에서 원수의 패배는 이미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 되었고, 그 원수를 패배한 채로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그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사탄은 그 영토에서 우리를 추방하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역습을 가할 수 밖에 없다.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이미 우리의 것인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새삼스럽게 싸울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었다. 아니,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다(롬8:37). 그러므로 그 안에서 우리는 선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승리를 기반으로 해서 싸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이겼기 때문에 우리가 싸우는 것은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승리를 의지하는 자가 이긴 자다. 

    승리를 얻으려고 투쟁할 때는 처음부터 싸움에 진 것이나 다름 없다. 가령 사탄이 당신의 가정이나 직장에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자. 어려움은 점점 커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며, 어떻게 해결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 닥쳐 와 당신을 압도한다. 당신은 며칠 동안 기도하고, 금삭하며, 투쟁하고, 반항도 해본다. 그러나 아무 효험이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당신이 승리를 위해서 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당신의 것이 된 그 진지를 사탄에게 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승리는 여전히 멀리 있으며 훨씬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도저히 그곳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한번 그러한 입장에 처해서 갈등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내 마음속에 데살로니가후서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셨다.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불법한 자를 죽이시리라는 말씀이다. 그때 내게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탄을 없애려면 오직 내 주님의 입김만 필요한 뿐인데 나는 왜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키려고 하는 걸까? 사탄은 단번에 영원히 패배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 승리 또한 이미 얻은 것이다.'

    오직 앉는 자만이 설 수 있다. 행하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서는 능력도 처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의 행함과 싸움은 다 똑같이 그 앉은 자리로부터 힘을 얻는다. 만일 하나님 앞에 앉아 있지 않으면 원수 앞에 서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탄의 첫째 목적은 우리를 범죄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승리의 진지에서 우리를 내쫓음으로 우리가 범죄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머리나 마음을 통해서, 즉 우리의 지식이나 감정을 통해서 사탄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안식하는 것과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에 대하여 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사탄의 모든 공격에 대비하여 방어하는 갑옷이 준비되어 있다. 곧 투구와 흉배와 띠와 신이다. 그런가 하면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가 있어서 사탄의 맹렬한 창살을 막을 수 있다.

    믿음은 밀한다. "그리스도는 높아지셨다".

    믿음은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믿음은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믿음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신다"(엡1:20; 2:8; 3:12, 17을 보라).

    승리가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우리의 것도 된다. 우리가 승리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고 단순히 그 승리를 유지하려고만 한다면, 원수가 완전히 패배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원수를 이기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서는 안 되며. 또 승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서도 안된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으므로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시다. 이것은 순전히 그분에 대한 믿음의 문제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기도보다는 찬양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더 단순하고 명백해질수록 그런 상황에서 기도는 더 적게 하고 찬양은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이긴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단지 승리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 기도가 찬양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는 한 우리의 근본적인 위치를 포기함으로써 사실상 패배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당신은 패배의 경험만 맛보아 왔는가? 혹 언젠가는 승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것이라고 기대해 왔는가? 그렇다면 당신을 위해서 내가 기도할 수 있는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했던 기도와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이 당신의 눈을 새롭게 뜨게 해주셔서, 당신 자신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분과 더불어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해주시기를 바란다(엡1:20-21). 당신 주위에는 여전히 어려운 일들이 있을 것이고, 사자는 여느 때처럼 큰 소리로 으르렁거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더 이상 이기기를 바랄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전쟁의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으로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에베소서 6장은 그리스도인의 전쟁의 개인적인 면보다 더 많은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 곧 바울이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복음의 비밀을 알리는 일과 관계가 있다(엡3:1-13을 보라). 이것을 위해서 지금 우리는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고, 그것과 꼭 함께 있어야 할 무기인 기도로 무장하는 것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6:17-20).

    

    하나님을 위한 관련해서 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다. 이 점에서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 주 예수님이 모든 통치와 권세 위에 뛰어난 자리에 앉아 계시고 또 만물이 그분의 발 아래 복종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엡1:21-22). 우리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엡5:20)하게 되는 것은 이와같은 완전한 승리를 알고 있을 때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아직까지도 하늘 나라에는 악한 영들이 있고 이 세상 주관자들의 배후에는 어둡고 악한 세력이 있어. 마땅히 하나님의 소유물인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방어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로 합당한 것일까? 우리는 그릇된 가정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외적으로 볼 때는 원수의 것인 영토를 점령하고 있고, 또 그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지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여기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한 것이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먼저 다음 두 구절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8-20).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16:23-24,26).

    예수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또한 그 이름의 권위를 모르고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 역시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위 성경 구절에서 언급하신 '이름' 이 단순히 예수님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호칭되었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물론 그 이름은 인간 예수님의 이름과 동일한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분께 주신 자격과 권위를 지닌 이름이다(빌2:6-10). 그것은 그분의 고난의 산물로서, 그분의 승귀와 영광의 이름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 으로 모이고, 또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바울만이 이런 구별을 한 것이 아니다. 위에 언급한 두 번째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예수님이 친히 이와 같은 구별을 하셨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요16:24, 26).

    제자들에게 "그날" 은 22절에 있는 "지금" 과 매우 다를 것이다. 그들이 "지금" 갖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그날에 받게 될 것이고, 받은 후에는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그 '무엇' 이란, 그 이름과 함께 오는 권위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셔서 생긴 그 큰 변화를 보기 위해 우리의 눈은 반드시 열려야 한다. 예수의 이름은 확실히 나사렛의 목수와 보좌에 앉으신 그분께 동일하게 사용된 이름이지만, 그 이상이기도 하다. 즉 그 이름은 지금 하나님이 그분께 주신 권세와 주권을 나타낸다. 그 권세와 주권 앞에서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잇는 모든 무릎이 반드시 굴복한다. 유대 지도자들까지도 단순한 이름에 이처럼 의미심장한 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절름발이를 고쳤을 때 제자들에게 묻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고 했다.

    오늘날 그 이름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에게 모든 권위를 위임하셨고 바로 그 이름 안에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주의해서 살펴봐야 한다. 실제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사용했다. 우리도 그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설교의 세 구절 안에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는 말을 반복하셨다(요14:13-14; 15:16; 16:23-26 참조). 그분은 자신의 권능을 우리의 손안에 두셔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하셨다. 그 이름은 그의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행4:12). 우리가 그 이름이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 이름의 능력은 세 가지 면에서 작용한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 그 이름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행4:10-12). 즉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고,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눅24:47; 행10:43; 고전6:11). 우리가 전쟁을 할 때 그 이름은 사탄의 세력에 힘 있게 대항하며, 그들을 결박하여 항복시킨다(막16:17; 눅10:17-19; 행16:18). 또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효과가 있다. 성경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와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나온다(요14:13-14; 15:16; 16:23). 이런 도전적인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주여, 주님의 용기는 실로 위대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자신을 위탁하신 일은 정말 놀랄 만한 일이다.

    이제 좀 더 설명해 주고 있는 사도행전의 세 가지 사건을 살펴보기로 하자.

    "베드로가 이르되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바울아 ...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19:13,15).

    먼저 문간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의 행위를 생각 해 보자. 그는 먼저 무릎 꿇고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 그냥 즉시 이렇게 말했다. 

    "걸으라."

    그는 예수의 이름을 마치 자기의 것처럼 생각하고 사용했던 것이다. 그 이름은 하늘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빌립보에서의 바울도 똑같았다. 그는 심중에 생각하기를 사탄의 활동이 충분히 멀리 가버렸다고 확신했다. 바울이 기도하기 위해 우물쭈물하고 있었다는 말은 없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이름의 관리인으로서 거의 자기 속에 그 능력이 있는 것처럼 곧바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가 명령하자 악령은 '즉시' 도망치고 말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자기를 인간에게 '위탁' 하시는 하나의 실례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종들에게 위탁하셔서 그들이 '그의 이름으로 ' 행동할 때 그들을 통하여 활동하신다. 그런데 그 종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분명히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 이름을 사용한다. 자기 이름이든 다른 사도의 이름이든, 다른 이름으로는 그와 같은 일을 해낼 수가 없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예수의 이름이 그 사건에 영향을 끼침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며, 종들은 그 이름을 사용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있는 우리를 보시지 않고, 영광 가운데 계시는 당신의 아들을 보신다. 그분의 이름과 권능이 이땅에 있는 우리에게 위임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되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는 우리를 보시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화를 들어보면 이 사실이 좀 더 명백해질 것이다. 얼마전 한 동역자가 나에게 사람을 보내어 얼마의 돈을 청구했다. 그의 편지를 읽고서 나는 그가 요구한 돈을 준비하여 편지를 갖고 온 심부름꾼에게 주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잘한 일인가? 물론 잘한 일이다. 그 편지에는 내 친구의 서명이 있었다. 나에게는 친구의 서명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심부름꾼에게 그의 이름, 나이, 직업, 고향 등을 물어보고, 그래도 그가 못마땅하면 그냥 빈손으로 돌려보내야 했을까? 아니다. 그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심부름꾼은 내 친구의 이름으로 왔으며, 나는 그 이름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기 위탁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자기 교회에 위탁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자기 종들에게 가장 위대한 능력을 주셨다. 그 능력으로 말하면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분의 능력이다(엡1:21). 예수님은 지금 하늘 나라에 올라가 계신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고, 그들의 마음에 이야기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을 행사하는 그분의 모든 사역은,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는 종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교회의 사업은 주님의 사업이다. 예수의 이름은 사실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신 위대한 재산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자기 위탁이 실제로 시행되고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일에 대해 친히 책임져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탁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완수하는 데 다른 방법을 취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탁하지 않으신 사업은 하나님의 사업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을 사용할 권한을 위임 받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담대히 서서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에는 영적인 영향력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두건대, 이것은 어떤 위기를 당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한 결실이며, 또 이미 알고 유지해 온 영적 지위에서 나온 결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 항상 사용할 수 있도록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행19:15).

    여기서 악귀가 바울을 안다고 한 것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겠다! 악한 세력은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 이에 대한 많은 근거들이 여러 복음서에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사탄은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하늘 나라에 속한 자로 간주한다. 문제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을 위탁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한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일이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그것은 어떤 조건에 한하여 내가 내 이름을 타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 준 것이며, 나는 그가 내 이름을 가지고 한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나의 수표장과 인장을 준 것과 같다. 물론 내가 은행 예금 계좌도 없고 개인적인 지위도 없다면, 내 이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학생이었을 대 어느 곳에나 내 이름을 써놓기를 좋아해서 책이나 문서나 손에 닥치는 대로 아무데나 도장을 찍곤 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으로 수표책과 은행 예금 계좌를 가지게 되었을 때는(기껏해야 우체국에 14불을 두고 있었지만) 내 인장 사용에 신경쓰게 되었다. 다른 누군가가 내 인장을 위조해서 사용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내 이름이 나에게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얼마나 능력이 많으시며 부요하신가! 그분의 이름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그러므로 그분이 자신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가진다면,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신중해야 하겠는가! 다시 한 번 묻겠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자기 자신을 위탁하실 수 있겠는가? 즉 그분의 은행 잔고나 수표장, 인장 같은 것들을 당신에게 위탁하실 수 있겠는가?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당신은 그분의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어야만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마16:19). 그러면 하나님은 실제로 당신에게 위탁하셨으므로, 당신은 이 세상에서 그분의 참된 대리자로서 활동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그분과 연합한 결과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에 자기 자신을 위착하시는가? 종종 우리의 서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하나님의 약속만 가지고 어떤 상황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 큰 위험을 무릅쓰는 것처럼 생각된다. 요점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후원해 주시는가? 또 후원해 주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완전히 자신을 위탁하실 수 있는 일의 네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간략하게 다루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관한 참된 계시를 우리 마음에 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계시 없이는 일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어떤 건물을 짓는다면, 아무리 미숙한 일꾼일지라도 내가 짓는 것이 차고인지, 비행장의 격납고인지, 궁전인지 꼭 알아야 한다. 계획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지혜로운 일꾼이 될 수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사업이라고 믿고 있다. 복음 전도는 다른 것과 일체 관련이 없지는 않다. 복음 전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과 연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을 높이는 것이며,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모아서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월등하게 높아지도록 하는 일이다.

    바울 시대에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특히4:11-16을 보라). 그것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장차 임할 그분의 황국에 쏠리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적인 기독교는 곧 다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절대 통치다. 그러나 솔로몬 왕국이 그러했듯이, 지금도 다윗의 통치에 의해 나타난 영적 전쟁의 시기가 있다. 하나님은 오늘날 그와 같이 계획된 전쟁에 같이 협력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나의 목적이 얼마나 일치하느냐의 문제다.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업은 단편적이고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결국에는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계시를 받도록 구하고(엡1:9-12참조). 그 다음에 우리가 현재 하고자 하는 사업에 관해서 스스로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 일이 하나님의 목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가?"

    그 문제가 해결되면, 그날 그날의 작은 문제들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둘째로, 거룩한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일 모든 사업은 반드시 하나님이 생각해 내신 것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업을 계획해놓은 후에 그 사업을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하나님이 그 일에 자신을 의탁하시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사업에 권위를 부여하는 고무 도장이 될 수는 없다. 실로 그런 사업에 축복이 임한다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임하지 전체적으로 임하지는 아니다. 거기에는 '그의 이름으로' 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애석하게도 오직 우리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아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도행저에 보면 성령께서 금지하시는 것이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가!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바울과 또 그와 같이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다(행16:6). 이어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성령의 활동에 관한 책이지, 성령의 무활동에 관한 책이 아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실제로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활동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침묵을 지키는 것도 배워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활동하시지 않으면 우리도 감히 꼼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 때,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대언하도록 우리를 믿고 내보내실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사업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그 사업은 그러한 지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업에 대한 영구적인 원리는 이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

    셋째로, 모든 유효한 사업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지탱해 나가야 한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이 말을 만연하게 사용한다. 어떤 사람을 두고 말하기를 "아, 저 사람은 참 능력 있는 설교자야." 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가 무슨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영적 능력인가 혹은 자연적 능력인가?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자연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비록 하나님이 어떤 사업을 시작하셨어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성취하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이 그 일에 자기 자신을 결코 위탁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럼 여기서 당신은 내가 말하는 자연적인 능력이 무엇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조직하는 일, 즉 복음 전도 운동이나 그 밖에 다른 기독교 활동을 계획하는 일을 맡기는데, 그에게 그 일을 부탁하는 이유는 그가 조직을 잘하는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일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겠는가? 만일 그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의존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문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감히 활동할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이르고 말 것이다. 

    스데반은 모세를 묘사하기를,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행7:22)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말씀하신 후 모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이니다"(출4:10)

    타고난 웅변가가 "나는 말을 할 수 없다." 라고 고백하는 경지에 이를 때 그는 근본적인 교훈을 배운 것이며, 정말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결정적인 단계와 일생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둘 다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행8:16, 19:5)는 누가의 표현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이 나타내는 것은, 모든 새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불활에 관한 근본적인 지식과 그것이 자신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가운데 우리의 자연적인 힘을 약화시키는 하나님의 최초의 손길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직 예수 안에만 있는 부활 생명의 터전 위에 굳게 서게 된다. 거기서는 사망이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한다. 그런 후에 그 범위는 계속 넓어져서 우리 자신의 정력도 십자가의 역사 아래로 들어온다. 그 길은 큰 희생이 따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것을 삶과 사역에서 결실을 맺는 분명한 하나님의 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을 하나님이 친히 후원해 주시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기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는 일들이 너무나 조직적으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었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강경하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4:5).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나무와 건초와 그루터기에 불과하며, 불 시험이 이를 입증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사업은 오직 거룩한 능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대문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오직 주 예수 안에서만 발견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아주 솔직하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외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대신 말씀하고 계심을 알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일을 끝낼 때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다. 따라서 장차 나타날 불은 오늘날의 십자가와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오늘날 십자가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훗날 그 불 속을 통과할 수 없다. 나의 능력으로 행해진 나의 사업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한들, 무덤에서 무엇이 나오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십자가를 견딜 수 없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결코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또 결단코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고, 또 그런 일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의 삶이며, 우리가 행하는 사업은 우리가 복종하는 성령에 의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사업이다. '자아' 라는 것은 그러한 삶과 사업에 장애물만 될 뿐이다. 우리 각 사람은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오! 주여, 나를 다스려 주소서!"

    끝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위탁하실 수 있는 모든 사업의 목적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 이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는 그 사업에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업으로 인하여 인간의 찬사를 적게 받을수록 하나님께는 그 일이 더욱더 크고 참된 가치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리다. 하나님의 사업에는 인간에게 영광을 돌릴 여지가 없다. 사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또 하나님의 사업의 기회를 열어 주는 봉사에는 깊고도 값진 기쁨이 있다. 그러나 그 기쁨의 근거는 하나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모든 것은 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엡1:6, 12, 14).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올바르게 해결될 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탁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중국에서 일하면서 얻은 경험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만일 우리의 사업이 하나님의 사업인지 아닌지 의심이 생기는 경우에는, 그 사업과 관련해서 기도를 해보면 응답이 시원하지 못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사업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업일 때는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위탁하신다.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때 당신은 그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으며, 모든 음부까지도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당신의 권한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어떤 일에 위탁하실 때 그분은 능력으로 나타나 자신이 그 가운데 계시고, 그 일의 창시자이신 것을 강격히 증언하신다.

    엘리야의 하나님

    결론적으로 내가 겪은 일을 말하고자 한다. 사역을 시작한 지 몇년 후, 우리는 어려운 시험기에 들어섰다. 실망과 절망에 가까운 날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취한 입장 때문에 사람들에게 숱한 비난과 의혹을 받게 되었고, 일부 진실한 신자들까지도 우리를 냉담하게 대하며 멀리했다. 우리는 먼저 우리를 반대하는 비난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서 철저히 조사해 보기로 했다. 언제나 비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분석해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 그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 단순히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특별히 어려웠던 한 해가 끝나 갈 때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백 명의 진실한 회심자들을 주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해 마지막에는 회심자 수가 최고점에 이른 것 같았다.

    수년 동안 해마다 관례적으로 해온 일이 있었다. 신년 초의 공휴일을 이용하여 전국에서 이모저모로 관계를 맺고 있는 신자들을 위한 집회를 도시에서 열었다. 금년에는 그 집회의 후원자가 나에게 참석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요청은 너무도 충격적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은 사탄이 나와 나의 형제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안식하는 진지에서 밀어내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이였다.

    신년 공휴일은 매우 길어서 보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그 기간은 집회를 가지기에도 기간이 적당하고, 복음 전도를 하기에도 아주 좋은 때였다. 우리는 주의 뜻을 구한 후에 주께서 복음 전도의 목적을 위해서 필히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보름 동안 설교를 할 목적으로 다섯 형제와 함께 중국 남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을 방문하기로 했다. 나중에 또 한 명의 젊은 형제가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를 '우' 형제라고 부르겠다. 나이가 불과 열여섯 살밖에 안 되었던 그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는데, 최근에 중생하여 생활이 현저하게 달라졌다. 그가 너무도 간절히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해서 약간 주저하던 끝에 허락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그 섬은 큰 부락이 있는 커다란 섬이었다. 나의 옛 친구가 그곳에서 교장으로 있었는데, 미리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묵을 처소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밤늦게 도착하자 그 친구는 우리가 복음 전도차 온 것을 알아차리고 숙박을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우리 일행은 온 마을을 다니며 숙박할 곳을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결국 어떤 중국인 약장수가 호의를 베풀어 주어서 그 집 다락방에 판자와 짚을 깔고 편히 지내게 되었다.

    머지 않아 그 약장수가 우리의 최초의 회심자가 되었다. 우리는 조직적으로 열심히 일했고 섬 사람들도 매우 친절했지만, 그럼에도 그 섬에서 얻은 성과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유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정월 초 9일째 되는 날, 야외 설교를 했다. 마을 한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던 우 형제가 갑자기 공개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왜 여러분 중에는 믿기로 결심하는 자들이 없습니까?"

    그때 군중 속에 있던 한 사람이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따왕'(大王)이라는 한 신이 있습니다. 그 신은 한 번도 우리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신입니다."

    우 형제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 신을 신임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286년 동안 매 정월마다 제사를 지내 왔습니다. 그 택한 날은 미리 예언으로 계시되는데, 매년 어김없이 그날은 비 한 방울, 구름 한 점도 없는 맑은 날이지요."

    "금년에는 언제 제사를 지내기로 했습니까?"

    "정월11일 오전 8시로 정했습니다."

    그러자 우 형제가 성급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약속하지요. 그날은 틀림없이 비가 올 것입니다."

    그랬더니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설교도 하지 마세요. 그날 비가오면 그땐 당신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그 마을의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대단히 심각한 일임을 알아차렸다. 그 소문은 성난 불꽃처럼 퍼져 나가 어ㅓ마 되지도 않아서 2,000여 명의 사람들이 다 알고 말았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즉시 설교를 중단하고 기도에 전념했다. 우리가 혹시 너무나 과분한 일을 했다면 용서해 달라고 주께 간구했다. 우리는 열심이란 열심은 다 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한 것일까?무서운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담대하게 하나님께 기적을 구해야 할까?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기 원할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된다. 교제에 관해서는 분명히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신의 믿음이 일치되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논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그럴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면 내어 버림을 당하는 것도 사양하지 말아야 할 것 이다. 결국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에까지 하나님을 끌어들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일이 이 섬에서의 복음 전도에 종지부를 짝을 것이고, 따왕이 영원히 지배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당장 떠나야 하는 것일까?

    그때까지 우리는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순간 불꽃처럼 내게 떠오르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였다. 나는 분명하고 힘 있게 다가온 이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았다. 나는 형제들에게 확신 있게 말했다.

    "저는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그날 틀림없이 비를 내려주실 겁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찬양을 올리고, 우리 일곱 명이 다 같이 나가서 모든 사람에게 힘차게 말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또 받아들였노라고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날 저녁 약장수가 두 가지 중요한 발언을 했다. 즉 따왕은 영향력 있는 신이었다. 사탄은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법이다. 그 신을 믿는 그들의 신앙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더 합리적인 설명을 원하는가? 이 마을은 전부 어부들만 살고 있다. 그들은 2-3개월 동안 줄곧 바다에 있었고, 보름날에는 또 나갈 것이다. 그들 모두는 오랜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서 2-3일 전부터는 비가 오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저녁 기도회에 갔을 때 우리는 모두 한 번 더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엄한 책망이 내려왔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이 전쟁을 우리의 방법대로 싸워 나갈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를 의지할 것인가? 엘리사가 이런 말을 했을 때 그는 무슨 일을 했던가? 그는 지금은 영광 가운데 있는 그의 스승 엘리야가 이행한 바고 그 기적을 자신도 체험하게 될 것을 주장했었다. 신약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그는 완성된 사업의 토대를 믿음으로 취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죄를 자백했다.

    "주님, 11일 아침까지는 비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잠을 잤다. 다음날인 10일 아침에는 그 이웃 섬에 일일 전도를 하기 위해 떠났다. 주님은 무척 은혜로운 분이셔서 그날 세 가족이 주님께 돌아와 공중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우상을 불태워 버렸다. 우리는 늦게 돌아와 녹초가 되었지만 매우 기뻣다. 우리는 그 이튿날 늦게까지 푹 잠을 잘 여유가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다락방 창문을 통해 태양 광선이 눈부시게 비쳐 오고 있었다. 순간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야단 났네! 비가 안 오잖아!"

    시간은 벌써 7시가 지났다.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주님, 제발 비를 내려 주소서!"

    그런데 다시 한 번 그 말씀이 내 귓전에 울려 왔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하나님 앞에 고요히 침묵을 지켰다. 주인을 포함해서 모두 여덟 명이 아침 식탁에 앉았지만 모두 조용하기만 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분명히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음식을 앞에 놓고 머리 숙여 기도 드릴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비는 지금 틀림없이 옵니다. 우리는 주께서 그 사실을 기억하시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책망의 기미가 없이 응답이 왔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아멘." 하기도 전에 기왓장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밥 한 공기를 먹고 두 공기를 막 먹으려고 하는데 소낙비가 계속 퍼부었다. 나는 말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이어서 우리는 더 큰 비를 내려 달라고 했다. 두 번째 밥공기를 들기 시작했을 때는 비가 양동이로 퍼붓는 것처럼 마구 쏟아졌다. 식사를 완전히 끝마쳤을 때 바깥 거리는 이미 물바다가 되었고, 대문 앞에 있는 층층대 세개가 물에 잠겨 있었다.

    곧 우리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다. 이미 첫 빗방울이 떨어졌을 대 몇몇 젊은이들은 터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계신다. 따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왕은 비에 눌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따왕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따왕을 의자가마에 싣고 왔다. 분명히 따왕은 소낙비를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불과 몇 미터를 간 후에 세 사람의 가마꾼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가마도 땅에 엎어져 그 속에 들어 있던 따왕의 턱과 왼쪽 팔이 박살나고 말았다. 그들은 더 마음을 굳게 먹고 응급조치를 취한 후에 넘어진 따왕을 다시 가마에 쑤셔 넣었다. 미끄러지며 비틀거리면서 겨우 끌고 잡아당기명서 마을 중간까지 왔다. 결국은 비가 사정없이 퍼부어 그들을 패배시켰다. 60-80대 노인들은 따왕이 좋은 날씨를 주겠거니 믿고서 모자도 쓰지 않고 우산도 없이 나왔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 그 제사 행렬은 흩어지고, 부서진 우상은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시 예언이 발표되었다.

    "오늘은 재수가 없는 날이오, 제사는 14일 오후 6시에 다시 드리겠소."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망므속에 다음과 같은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은 14일에도 비를 내려 주실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러 갔다.

    "주여, 그때까지 4일 동안은 청명한 날씨를 주시되 14일 오후 6시에는 비를 내려 주소서."

    그날 오후는 하늘이 맑게 개어서 복음을 전했더니 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님은 그 짧은 3일 동안 그 섬에서 우리에게 30명이 넘는 참된 회심자들을 주셨다. 드디어 14일 아침이 밝아 왔다. 다른 날들과 같이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집회도 잘했다. 저녁이 다가오자 우리는 또다시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조용히 주님이 그 문제를 기억하시도록 했다. 1분도 늦지 않고 주님의 응답이 왔는데, 역시 전에처럼 억수 같은 비가 솓아졌다.

    그 다음날 우리는 떠날 시간이 되어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 후로는 다시 그 섬에 들르지 못했다. 이후로 다른 사역자들이 그 섬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그곳에 대해 어떠한 주장을 하든지 우리는 문제 삼지 않았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그 우상 안에 있는 사탄의 능력이 부서졌고, 영원히 힘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왕은 더 이상 영향력 있는 신이 아니었다. 그 후에는 영혼의 구원이 뒤따랐을 것이지만, 그것은 이 중요하고도 변함없는 사실에 따르는 부산물이었다.

    그 감명은 우리 모두에게 지속되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탁하셨다. 우리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의 권세를 맛보았다. 그 이름은 하늘과 땅과 음부에서까지 능력이 있는 이름이다. 그 며칠 동안 우리는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뜻의 중심'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말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막연하거나 공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친히 겪은 체험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우리는 함께 "그 뜻의 비밀"(엡1:9)이라는 것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나는 몇 년 후에 우 형제를 만났다. 한동안 연락을 귾고 지냈었는데 그 사이에 그는 비행사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아직도 주님을 따르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니 선생님! 우리가 겪은 그 모든 체험들이 있는데 제가 주님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우리는 진지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주께서 우리를 위해 획득해 놓은신 진지 위에 서서, 단호하게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된다. 우리눈이 정말로 열려져서 우리의 승리자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될 때 우리 입에서 자연스럽게 찬양이 나오고, 그 찬양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범사에 그분의 일므으로 감사를 드린다(엡5:19-20). 애써 하는 찬양은 힘이 들고 화음이 맞지 않지만, 그분에게 의존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울려나오는 찬양은 언제나 맑고 감미롭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 것과 그에 의해 행하는 것, 그 안에 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완성하신 사업에 의존함으로 영적인 생활을 시작한다. 이 의존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행하기 위한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어두움의 주관자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끝날 때 우리는 마침내 승리로 얻은 진지 위에 주님과 함께 굳건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